예수의 실종 - 누가복음 2:41-51
오래전에 너무나도 유명한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 사건은 한 때 온 국민들의 가슴을 조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그나마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사람들의 관심도 차차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들의 가슴앓이는 말과 글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부모는 직업을 버리고 전국을 이 잡듯이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어떤 부모들은 실성할 정도로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는 예수의 실종이 나옵니다. 예수를 잃어버리고 3일 만에 다시 찾은 사건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여기 한 곳 밖에는 없습니다. 아마 이 사건은 예수님의 유년시절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커다란 뉴스거리 였습니다. 오늘날도 어린이의 실종사건은 바로 뉴스의 초점이 되듯이 열두 살 먹은 아이 예수의 실종사건은 그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에는 커다란 뉴스 거리였습니다.
물론 이 성경은 예수의 실종 사건 그 자체보다 부모와 떨어진 이후에 어린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대 학문의 석학들과 성경토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튼 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에 앞서서 우리는 본문의 전후좌우를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일년에 한차례 유월절 절기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율법에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세 번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주로 유월절 절기만은 빼지 않고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가정도 예외 없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음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열두 살이면 벌써 6년 동안 율법교육을 회당에서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유대인 자녀는 누구든지 율법을 배우되 3년은 초급반 3년은 고급반으로 두 차례에 걸쳐서 율법을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초등학교 교육이 국민교육의 기초이듯이 열두 살 된 예수님은 이미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갖추어야 할 모든 교육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열세 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로서 대우를 받고 율법을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그보다 일년이 빠른 열두 살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행사는 일주일동안 행해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축제였습니다. 수도인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 그리고 제물용으로 가져온 소, 양, 비둘기 그리고 타고 온 나귀들하며 사람들로 온통 북적대었습니다.
거기다가 장사하는 사람과 환전상 등으로 예루살렘은 참으로 복잡했습니다. 요셉의 가족은 여러 친척들과 함께 왔기 때문에 이야기의 화제도 많았고 구경거리도 심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 마치고 가족들은 가벼운 마음과 들뜬 마음으로 시골 나사렛으로 내려갔습니다.
요셉가족은 시골로 내려가는 도중, 함께 동행하는 친척들과 수많은 여행자들로 말미암아 오랜만에 화젯거리도 풍성했고 즐거운 나들이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다간 후에야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실종된 것을 알았습니다. 부모들은 친족들과 주변에 아무리 수소문해도 예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큰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가족들은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의 마음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난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부모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성경에서는 없지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뛰어 다니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우리 예수 못 봤느냐고 만나는 사람마다 미친 듯이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또 다시 하룻길을 가서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만났으니 꼭 하루는 예루살렘 거리를 이 잡듯이 누비며 예수를 찾아 헤맨 것입니다.
예수의 부모들은 예수를 읽어버린 후 3일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했습니다. 막상 아이 예수를 찾고 보니 반가움보다도 놀라운 사실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당대의 율법학자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며 토론을 벌이는데 그 총명함과 지혜가 놀라왔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모는 도리어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조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고 했습니다. 부모 자신이 아이에 대한 무관심과 실수는 인정치 않고 예수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즉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라고 했습니다.
사실 본문의 핵심은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말씀은 옛날에 있었던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비록 나이 어린 예수, 열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예수이지만 그는 이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당연히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모들을 향해서 어찌하여 그것을 모르는가 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그가 왜 세상에 오셨고 그의 신분이 어떠함을 계시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라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모들은 생각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근심하게 만들었는가 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대답은 어찌하여 날 찾았는가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위대한 스승이나 인간의 모델로 생각해서는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라는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오늘날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여기 저기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교양종교로 보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소원 성취 종교로만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의 신앙이 아니고 자기 편리한대로 자기중심적으로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성경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요, 또 우리의 구원의 주이십니다. 그는 오늘의 우리 아픔과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21세기니, 2000년대니, 꿈의 시대가 온다느니 정보화의 시대가 왔느니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인간의 문제는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마치 2천년 전의 인간의 문제가 바로 오늘의 문제이듯이, 미래의 문제도 오늘의 문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구주이신 예수를 만날 때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했고,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당연히 예수님이 우리의 주 되심과 우리의 생명되심을 고백하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와 동행하는 삶이 곧 신앙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walking with God)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기자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와 동행하는 삶이 곧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에 적용할 만한 것이 있다고 봅니다.
우선 군중들의 틈에 끼어 교제하고 즐기는 일에 바빠서 예수를 잃어버린 줄 모르고 하룻길을 가버린 요셉과 마리아를 봅시다. 솔직히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잔뜩 축제의 분위기에 들떠 있었던 데다 예수는 열두 살을 먹었기에 으레껏 친지들 틈에 끼어 함께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무심하고 친족들과 이야기하고 함께 즐기는 일에 열중하면서 가다보니 예수가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는 줄 착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문제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하게 살기 때문에 의례껏 예수와 동행하는 줄 착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이 내 마음에 주인으로 계시지 않고 일 주일 동안 사는 동안에 도대체 예수는 어디도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날마다 친구들과 시간약속을 하여 만나고 희희낙락 즐기면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속 어디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뿐입니까? 우리의 그 수많은 대화 속에서 예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교회라는 울타리에 살면서도, 여러 가지 종교행사에 참여하면서도 정작 예수를 실종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즉 예수없는 예배 행위, 예수없는 각종 모임, 예수없는 찬송, 예수없는 구역예배, 예수없는 교제, 예수없는 프로젝트, 예수없는 구제 행위 등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봉사 가운데도 예수를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마치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 성전예배와 순례의 길, 축제의 길에서 예수를 잃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은 과연 예수의 실종시대입니다. 교회에는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신학교도 많을 뿐 아니라, 기독교 서적도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우리의 구체적 삶 가운데 예수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예수를 실종한 것입니다. 교리 논쟁 속에서 예수를 실종하기 쉽고, 이른바 기독교 사업 중에서도 예수를 실종하기 쉽습니다.
이른바 총회니 노회니 하면서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도 예수를 실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다른데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흘리고 있을 때 군병들은 예수의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 제비를 뽑고 있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예수가 가까이 있다고 예수를 모시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 속담에 교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비교적 하나님과 멀리 있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예수와 동행하는 일에 우리의 삶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와 동행한다는 뜻은 우선 예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와 동행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나름대로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쯤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이란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변화된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가 흥분해서 초막집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짓고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자고 제안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저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실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속주의, 인본주의, 유물주의 사상 때문에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홍수 때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가장 교회가 많은 시대에 예수를 실종한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계시록의 말씀처럼, 어디서 예수를 실종했는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의 실종, 그것은 2천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 아 멘 - |